어머니, 당신을 지키지 못했지만
마지막 말씀은 지켜냈습니다
"아직도 학살의 악몽에 자다가도 깨어날 만큼 고통이 가시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어요."
하나로교회 조은성(42) 목사는 2001년 4월29일 사건을 꿈에서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와 맏형 일행이 두만강을 건너다 북한 군인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목숨을 잃은 날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맏형 일행은 이날 중국에서 식량을 구해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날 북한 군인들이 어머니와 맏형 일행을 발견한 뒤, 자동소총 개머리판으로 내려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순간 평화로운 두만강은 비명과 절규의 아수라장으로 변했지요. 바로 35∼40m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두만강 건너편 중국 땅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우리는 울부짖었어요. 제발 그만 때리라고요…."
북한 군인들이 이들을 그토록 심하게 구타한 것은 탈북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50년 넘게 북한에서 가정교회를 섬긴 죄목이 더 컸다. 식량을 구하는 동안 중국 3자교회에서 북한의 가정교회 간증을 한 게 화근이었다. 누군가 밀고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2005년 탈북한 여동생을 제외한 아버지 등 5명의 식구들도 모두 이 죄목으로 숙청됐다.
"어머니는 9세 때부터 친정 식구들을 따라 교회에 다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집을 와 아버지를 전도했고 밤이 되면 몰래 집 뒤로 가서 아버지와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부모님 입에서 '음 음…' 하면서 읊조리는 것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조 목사는 1997년 2월 탈북, 중국에서 4년여를 살다가 동남아시아를 거쳐 2001년 7월 한국에 왔다. 중국 공안을 피해 농촌에서 벼·옥수수 농사, 양치기, 소 기르기, 개 먹이 주기 등 막일을 전전하며 허기를 채웠다.
조 목사는 원래 북한의 여느 사람들처럼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청진 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7년 동안 김일성 부자 체제를 가르치는 역사 교사였다.
"제자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비록 예수님을 알기 전 일이지만 북한 청소년들에게'기독교는 우리 사회주의를 좀먹는 반동의 원흉'이라고 사상 교육을 시킨 것도 견딜 수 없었어요."
하나님은 그를 무신론자로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다. 어머니의 인도로 중국 지린성 옌볜의 어느 교회에 들어갔다가 신앙을 접하게 됐다. 교회를 찾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탈북자를 대하는 교회의 온정이 고마워 신앙을 갖게 됐다.
어머니는 북한군에 잡히기 10분 전, 마지막 당부의 말을 했다.
"남한에 가거든 꼭 목회자가 되거라. 일생을 이 땅의 불쌍한 영혼들을 섬기며 살아라."
그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목회자가 됐다. 예장 개혁선교(총회장 박영남 목사) 총회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해 지난해 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탈북자 전문 하나로교회를 경기도 부천시 원종동에 개척했다.
조 목사는 30여명의 탈북 동포들과 함께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자본주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자들에게는 직장을 알선하고 인생 상담을 해주는 것도 주된 사역이다.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북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계획이다
"국내 탈북자 수가 1만5000명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한국에 들어오는 탈북 동포 대부분이 중국 등에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신앙적으로 정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들의 영혼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탈북동포들을 위한 신앙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기도와 관심으로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