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기(2007~현재)

[서울 종로구] 역사의 아름다운 유산 경복궁 아는만큼 보인다.[2월 29일]

여행을 꿈꾸며 2012. 4. 21. 21:15

오늘은 아이들의 봄방학을 맞아 서울로 나들이를 출발한다.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하기로 했으나 깜박 늦잠을 자고 말았다.

일어난다고 일어난 것이 아침 6시30분...

소스라치게 놀라서 계획을 세운 시간보다 2시간 늦게 일어났으니?

빨리 서둘러 준비를 요청한다.

8시30분에 창원을 출발한다.

아내는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지만, 그래도 올라가는 시간이 4시간은 족히 넘게 걸린다.

 

가는길은 설명드리지 않아도 다 알 것으로 사료되나 다시 한번...

 

창원~중부내륙고속도로~현풍JC~여주JC~영동고속도로~이천~강남고속터미널~강남올림대로~한남대교~경복궁

 

경복궁은 옛날에 수박 겉할기식으로 대중 돌아보았지만, 1박2일을 보고 나서 많은 부분이 공부가되었다.

유홍준교수님의 해설을 기억하며 아이들과 함께 숨은 그림 찾듯이 관람을 시작하기로 한다.

11시에 도착하여 경복궁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한다.

유료주차장이니 최대한 빨리 구경을 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광화문-궁궐의 얼굴]

 경복궁의 4대문은 높은 석축위에 우뚝선 문루와 석축 가운데로 낭 아치형의 홍예문을 갖추어 성곽의 문과 같은 웅장함을 자랑한다.

그 중 정문인 광화문은 문루가 2층이며 홍예문이 셋으로 조선궁궐의 모든 문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어

그 위풍당당함이 눈기릉 사로 잡는다.

조선 태조때 건립된 이후 임진왜란으로 전소, 일제의 총독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전, 6.25전쟁 시 문루 소실등

험난한 질곡의 세월을 겪엇으며, 1968년 중심축이 틀어진 채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2010년 8월 제모습을 찾은 광화문이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종 연간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일제에 의해 변형된 축선이 제자리를 찾았다.

 

경복궁의 시작은 옛날에 잃었던 장소인 광화문부터 시작된다.

이 곳이 경복궁의 대문역할을 했을진데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기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지었던것이다.

이제와서 복원되어 바라보니 우리의 것이 좋은 줄 알겠다.

 

 

 

일단 입장권부터 구입한다.

어른들은 인당 3,000원이고 청소년들은 역사를 공부하라고 공짜표를 준다.

주차장쪽이 경복궁 오른쪽인데 그쪽으로 들어가본다.

 

[조선을 상징하는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제일의 궁궐이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가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 가정 먼저 건립한 궁궐로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크고 격식도 매우 엄중하다.

경복궁은 북한산(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목멱산)에 둘러싸여 있고 그 중심에 청계천이 흐르는 평지에 자리 잡았다.

입지를 고를 때에는 좋은 땅은 좋은 기운을 불러들인다는 생각에 매우 신중했으며, 전각들은 최고의 권위자인 왕이 머무는 공간인 만큼

나라에서 으뜸가는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왕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돌보고 왕실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궁궐에는 필요한 전각이 많았다.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이들이 이루어내는 공간은 창건 당시부터 매우 짜임새 있게 계획 되었다.

궁궐의 주요 문과 전각인 광화문(정문)과 근정전(정전), 사정전(편전), 강녕전(침전)은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적선상에 놓였고,

이들 주요 전각에 딸린 부속 전각들은 각 영역 안에서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배치되었다.

둘레에는 네모반듯하게 궁성을 쌓았고 동서남북 네방향에 문을 냈다.

경복궁 건축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엄중한 질서와 절제의 위엄은 예의와 도덕으로써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한 조선왕조의

기본 정신에서 비롯된다.

궁궐의 전각들이 각기 서열과 쓰임새에 걸맞은 규모와 모양새로 지어졌을 뿐 호사스럽거나 위압적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경복궁은 "만년토록 빛나는 큰 복을 지닌 궁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고종은 임진왜란후 273년 동안 빈터로 남아 잇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330여 동 7,700여칸의 전각을 지었다.

현재 궁궐 곳곳에 깔린 잔듸밭은 대부분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섰던 곳들이다.

 

 

광화문을 통과하는데 천정을 보니 화려한 봉황새가 그려져 있다.

우리는 가끔씩 앞만 바라보고 갈때가 많다.

가끔씩 좌우 양옆 그리고 위와 뒤를 바라보면 색다른 경치나 볼거리를 구경하곤하기도 한다.

광화문에서 흥례문도 바라다보인다.

 

 

광화문이 복원되었는데 앞모습도 멋있지만 뒷모습 또한 더욱 멋드러진다.

여기에서 수문장 교대식이 시간에 맞추어 진행된다.

우리가 들어갈 때는 보지 못하였지만 나올때 볼수 있었다.

 

 

 

 

근정전까지 가기위해서는 대문을 두개나 통과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흥례문이다.

여기에는 거대하지는 않지만 단아하고 아담한 대문역할을 한다.

이렇게 대문이 많았던 이유중의 하나는 궁궐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함도 있다 하겠다.

 

 

우리나라의 기와집은 처마선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익히 나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보지 못한 한복의 곡선과도 같이 직선의 미학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시선도 자꾸 처마선으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근정문으로 가기전에 수로시설이 되어있어 다리 한쪽편에 미지의 동물이 메롱하는 모습을 표현하여

옛 선인들의 위트와 재치를 알 수 있다.

이는 한옥의 딱딱한 분위기를 해학적으로 표현하여 다리를 건너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근정전을 들어가기 전의 문인 근정문이 우리 앞에 다가선다.

근정전의 문이라서 문틈사이로 근정전이 바라다 보인다.

 

 

근정문을 통과하면 날의 큰 행사나 외교사절들을 맞이한 장소로 사용된 근정전이 위용을 드러낸다.

멋스러움이 묻어난다.

그리고 경복궁의 메인 건물답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만큼 그 인기가 대단하다.

 

 

 

 

 

 

물길을 잡아놓는 대리석 앏게 잘라서 깔아놓은 박석이라고 한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팁을 집고 넘어가자

중앙으로 약간 올라온 곳이 왕이 다니는 어도이고 그 양옆으로 신하들이 걷는 신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다.

 

비가 오면 물줄기를 만드어 배수를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이또한 선인들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그래서 지금도 보도블록을 깔아서 멋도 내고 물을 다스리는 지도 모르겠다.

 

 

 

 

[근정전-궁궐의 중심 외전]

근정전은 왕이 뭄누백관에게 조회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며 즉위, 책봉, 혼례 같은 나라의 주요한 행사를 치르는 곳으로,

왕과 나라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인 이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중층의 전각은 높고 넓은 2층의 월대 위에 당당히 올라서 있으며, 근정전 주변을 둘러싼 행각의 기둥들은

마치 왕을 호위하는 듯 줄지어 있다.

 

 

 

근정전 둘레는 상단과 하단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위단을 상월대라 하고 아랫단을 하월대라고 한답니다.

상월대에는 방위신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등을 배치했으며, 하월대에는 십이지신상을 배치했답니다.

말을 배치한 곳이 12시 정오를 가르치는 위치라고 합니다.

 

 

왕의 업무를 보고받고 국가일을 보기위한 장소로 뒤의 병풍이 일월도로 유명하다.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왕의 위엄을 느끼게 해준다.

 

 

드므는 평소에 물을 받아놓아서 화재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는 상징적인 방화수 역할을 했습니다.

물에 비친 화마가 자기얼굴이 물빛에 비친 것을 보고 놀라 달아나라는 의미에서 드므를 건물마다 두었다고 합니다.

 

 

 

 

 

 

 

국가의 대소사나 사신들을 맞이 하는 행사들을 할때 천막을 치기 위해 걸고리를 군대 군대 박아놓았다.

저기에 밧줄을 고정하게 되어있다.

 

 

품계석으로 계급에 따라서 자리의 위치도 정해진 옛날의 봉건적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맨앞이 정일품으로 시작하여 맨뒤가 정구품으로 표시되어 있다.

 

 

근정전 뒷쪽으로 사정문을 통과하면 사정전이 나온다.

 

 

궁궐의 창고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기둥에 무엇을 저장하는지 창고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사정전-외전]

사정전은 왕이 평소 머무르며 나랏일을 돌보앗던 곳으로, '깊이 생각하여 나랏일에 임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조선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평가받은 세종이 밤늦도록 학문을 연구하고 집현전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었던 곳도 사정전이다. 

집현전 이외에도 왕의 집무 공간 가까운 곳에는 업무의 신속한 처리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설치한 관청들이 있었다. 

궐 안에 들어왔다 하여 궐내각사'라 불린 여러 관청 전각들 가운데 수정전이 남아있다.

그 수정전 위치가 집현전이 있던 자리이다. 

 

 

 

아래 사진은 사정전왼편에 설치된 앙부일구로 솥을 받쳐놓은 듯한 모양의 독특한 해시계이다.

 

[앙부일구]

그림자가 비치는 면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모양이다.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각과 절기를 동시에 알 수 있다.

 

 

 

 

사정전뒷편의 굴뚝이다.

경복궁은 굴뚝을 예술로 승화시킨 조선의 아름다운 궁궐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끄름으로 더러운 곳을 아름답게 예술로 꾸며놓았으니 말이다.

 

 

 

강녕전은 조선임금의 거처로 이곳에서 잠자리를 했으며,

용마루가 없는 곳이 경복궁에는 두곳이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이 그 곳이다.

용으로 상징된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곳이기에 용마루가 없다.

 

 

 

강녕전 뒷편에 바로 굴뚝이 없다.

그래서 굴뚝을 아는 사람들은 한참을 찾곤 한다.

나두 1박2일을 통해서 그 진실을 알았으니, 바로 오른쪽에 답벼락에 설치된 붉은 벽돌로 쌓여진 두기둥이 강령전의 굴뚝이란다.

오래동안 열기를 보관하기위해 땅밑으로 연기통로를 내어 담벼락으로 설치한 것이다.

 

 

 

국모인 왕비의 휴식과 생활공간으로 세자들을 낳았고 왕실가족의 화목과 질서를 유지할 권한과 임무가 정해졌다.

여기에도 용마루가 설치되지 않았다.

 

 

 

[교태전의 아미산]

굴궐안에 한 번 들어오면 궐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던 왕비를 위해 꾸민 정원이다.

야트막한 동산을 계단식으로 꾸미고 곳곳에 나무와 꽃을 가꾸었다.

화단에 세운 육각기둥 모양의 굴뚝에는 학, 박쥐, 봉황, 사슴,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덩굴, 바위 등 무늬를 장식하였다.

아미산과 굴뚝의 여러 장식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기자기 하다.

 

 

 

자경전은 왕실의 웃어른 대비께서 생활한 공간이다.

각방에 연결된 굴뚝들을 한데 모았으며, 굴뚝이 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점이독특하다.

교태전과 자경전을 둘러싼 담장 안팎의 꾸밈새가 궁복궁에선 참으로 아름답다.

 

 

 

 

 

[자경전 십장생굴뚝 벽화]

                                                                                                       보물 810호

                                                                                                 뒤틀에 있는 굴뚝에는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자손의 번성을 상징하는 포도,

부귀를 상징하는 박쥐무늬 등

장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