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세상 이야기

[스크랩] 박칼린이 고백하는 유년 시절과 특별한 가족 이야기

여행을 꿈꾸며 2010. 12. 6. 17:37

레이디경향 | 입력 2010.12.06 16:04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두 나라 생활을 하며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는 이제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예술인이 됐다. 남들과 조금 다른 성장 과정을 보내면서 상처받았던 나날도 많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큰 가슴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다양한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푸른 눈의 이방인, 한국을 사로잡다


박칼린(43), 그녀는 2010년의 핫 아이콘이다. 지난여름 방송된 KBS-2TV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하모니' 편에서 진심 어린 사랑과 믿음으로 오합지졸 합창단을 이끌던 모습은 따뜻한 카리스마의 진수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신데렐라가 아니다. 방송에 출연해 합창단을 이끌기 이전부터 20여 년간 한국 뮤지컬계에 몸담으며 음악과 예술감독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박칼린은 미국 유학생이었던 아버지 박근실씨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아이렌 박 사이에서 막내딸로 미국 LA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한국에 들어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9년간 부산에서 살았고 성악을 전공했던 어머니, 한국무용을 배웠던 큰언니 킴벌리, 개나리 합창단원이었던 작은언니 켈리 밑에서 일찍이 첼로와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인으로서 재능을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릴 적에는 혼혈아라는 사실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갈색 머리와 푸른 눈빛의 이방인을 향한 친구들의 놀림은 어린 박칼린에게 큰 상처이자 외로움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그녀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찾아 1983년에 다시 귀국하여 경남여고 1학년에 편입했다. 음악 가족의 피를 타고난 덕분에 학창 시절에도 예술 방면에 관심이 많았고 연극반 특별활동을 통해 고교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교 생활 1년여 만에 다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를 부모로 둔 탓에 두 나라 생활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첼로 전공으로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음악과 연극에 흠뻑 빠져 지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1991년에 한국으로 다시 들어와 서울대 대학원 국악작곡과에 진학해 전통 음악을 공부했다. 어릴 적에 잠시 배웠던 대금과 가야금도 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푸른 눈빛의 여인이 국악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녀가 한국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삽살개 두 마리. 일상에 지칠 때면 어김없이 이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뮤지컬 '명성황후'의 음악감독으로 데뷔한 후에는 '사운드오브뮤직', '페임', '시카고', '아이다', '미녀와 야수' 등 내로라하는 뮤지컬 작품의 음악을 책임졌다. 음악감독은 물론 연출가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고 현재 호원대학교 뮤지컬과 교수로 재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물론 한 여자로서 사랑과 이별을 반복한 시절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연극을 통해 만난 연극인과 결혼했지만 현재는 강아지들과 살며 솔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8년째 신장병을 앓고 있기도 하지만 생활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을 정도이기에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강하고 씩씩한 그녀다.

그런 박칼린이 얼마 전에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출간했다. 지난 3년 동안 오늘날의 유명세와 상관없이 써내려온 유년, 음악, 사랑, 일상, 여행 등에 대한 고백이다. 독특한 성장기의 추억부터 다양성, 균형, 열정과 도전이라는 그녀를 이루고 있는 가치관 등 인간 박칼린의 모습을 모두 담아냈다. 특히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한 담담한 추억은 그동안 그녀가 꽁꽁 감춰왔던, 이제야 뒤늦게 공개하는 소중한 시간들이기에 더 눈길이 간다.

#1. 부산, 유년의 추억 가득한 제2의 고향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부산에는 저마다 각자의 배를 끌고 바다에 나가 생선을 잡아서 먹고 사는 집들이 많았다. 그래서 생선뼈가 많이 남아돌았던 게 옛날 부산의 풍경 중 하나다. 생선뼈가 생기면 콩나물을 넣어서 푹 고아 먹곤 했는데…. 짭조름한 콩나물을 한 가닥씩 빼먹을 때마다 조금씩 생선살이 딸려온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추억의 음식이다. 이렇게 크고 나서는 다시 그걸 맛볼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는 더더욱 모르는 음식이었고, 다시 돌아온 부산에서도, 전라도에서도 먹을 수 없었다. 부산에 살고 계신 숙모는 그건 싱싱하고 좋은 생선이 많았던 예전에나 먹을 수 있던 거라 했다. 지금은 아무도 안 만들며, 만든다 해도 그 맛이 안 날 거라고 했다. 이제는 먹을 수 없다는 증언을 들으니 그 맛이 더욱 그리웠다.

어렸을 적 부산에서 살 때 엄마는 목요일 저녁마다 부산항 앞에 있는 씨맨스 클럽에 우리 세 자매를 데리고 갔다. 그곳은 외국 선원들을 위한 서양식 레스토랑이었다. 외식을 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쳐주기 위해 엄마는 그렇게 목요일마다 우리에게 단정하게 옷을 입혀 그곳에 데려가고는 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서는 정확하게 10주에 한 번씩 집에서 파티를 열곤 했다. 엄마가 가르치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주요 손님이었는데, 우리는 우리보다 나이 많은 손님들을 접대하며 음식을 준비하는 요령, 사람들과 대화하는 요령, 새로 온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법 등을 자연스레 배웠던 것 같다.

#2. 한국으로 시집온 어머니의 '아리랑 전설'

파란 눈에 금발의 어느 외국 여인, 그 여인이 한국 노래를 부른다. 뭐, 요즘에야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때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다. 그것도 부산에서다. 때는 1980년대 초반, 아직 연탄불에 물을 데워 써야 했고, 버스 안내양들의 '오라이, 오라이' 소리를 들을 수 있던 시절.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인 엄마는 자식 교육에 열성적인 분이셨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지혜를 전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재잘거리는 세 딸들의 모든 질문에 늘 진지하고 사려 깊은 답변을 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감정을 우리에게 새겨주려는 듯 그렇게도 세게 안아주고 했다.

그런 엄마는 유난히 음악을 사랑했다. 엄마는 미국에서 소중히 간직해온 LP판 한 장을 한국으로 가져오셨다. 거기에 말러 교향곡 1번이 실려 있었는데 밤마다 그걸 틀어놓고 우리를 재웠다. 그리고 빈소년합창단과 여러 발레 공연 등이 있을 때마다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열다섯 살 때쯤 엄마와 함께했던 남미 일주에서.

이렇게 우리 집은 모두 예술을 사랑하고 음악을 했다. 그 중 유독 노래만큼은 철저히 엄마 몫이었다. 원래 성악을 전공하다가 한국으로 오신 거였고, 한국인 아빠와 사랑에 빠진 것도 뉴욕의 한 대학에서 엄마가 부른 '아리랑'에 아빠가 매혹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게 우리 집의 '아리랑 전설'이다.

엄마는 외국 여자였지만 한국의 팔도 민요는 물론 가곡, 그리고 엄마가 '지구에서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던 이미자 선생의 노래까지 정말 한국 노래를 많이, 깊이 사랑했다. 비디오는 외국인, 그러나 오디오는 한국 가곡으로 딸들의 추억을 가득 메운 우리 '엄니'였다.

#3. 혼혈 자식을 둔 아버지의 애통한 눈물


아마 여덟 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와 학교 준비물을 위해 동네 근처 공터에서 봉지에 모래를 담고 있는데 어떤 그림자가 우리 둘을 가리는 거였다. 언니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눈앞에 떡하니 덩치 큰 남자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고는 놀랐다. 아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였던 것 같다. 그 남자는 다짜고짜 언니에게 시비를 걸었다.

"넌 왜 노랭이랑 노니?"
순간 언니는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언니에게 울지 말라고도 못했고 그 남자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키 작은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너네 나라로 가!!"
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몰라 한참을 멀거니 서 있다가 울고 있는 언니 팔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몇 번이고 돌에 발이 걸렸던 것 같기도 하다. 집은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지. 언니를 집에 들여보내고 나도 집에 돌아왔지만 왜 그날따라 잠겨 있는 대문이 그토록 야속하던지, 참. 나는 대문 앞에 앉아 얼른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안에서 아빠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빠는 내 얼굴을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라 조금 머뭇거렸다. 아빠는 여러 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아빠에게 공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쳤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아빠가 나를 안으며 말했다.

"칼린, 그건 그냥 네가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생겨서…. 그건 그 사람이 몰라서 그런 것뿐이야."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자 아빠가 말했다.
"칼린, 여기도 네 나라고, 미국도 네 나라야. 그리고 모든 나라가 너의 나라란다."





어린시절의 세자매(왼쪽). 엄마가 처음 나와 언니들을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여권 사진. 최근에 발견한 사실은 우리 넷 모두 정면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

그 말을 마친 아빠가 울기 시작했다. 그 무엇보다 아빠가 우는 것이 모두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나는 가만히, 울고 있는 아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는 모든 걸 감싸 안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겠지만 이런 식의 난감함 앞에서는 여전히 놀라고 여전히 마음 아파하는 게 분명했다.

#4. 박가네 세 자매, 사랑하는 언니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사는 나와 언니 둘은 몇 년에 한 번꼴로 만난다. 우리 식구는 다 합쳐 다섯 명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오래 살았던 탓에 한 나라에서 함께 만나기가 힘들다. 그래서 함께 모이게 되면 가족사진을 찍어두는데 그 유물이 고작 두 개뿐이라고 하면 짐작이 갈 것이다.

여하튼 서로 보기가 힘들어서인지, 아님 원래 여자들이 말 많은 종족이어서인지, 자연스레 생긴 집안 풍습이 하나 있다. 내가 미국으로 들어갈 때면, 아님 딸 셋이서 어디든 한 곳, 한 나라, 한 도시에서 만나기만 하면 우린 장황한 '간만에 수다 떨자' 의식을 반드시 치른다. 그러면서 밤새는 것이 박가 집안 딸내미들의 전통이 되었다.

수다 의식은 언제나 이러하다. 첫째, 가벼운 먹을거리를 주문한다. 다음, 첫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비즈니스, 남자, 애완견, 커리어, 집 등 일단 지난 몇 년간의 과거를 서로에게 업데이트해준다. 그 다음엔 서로의 근황을 제각기 업데이트한다. 과거와 현재가 어느 정도 서로 업데이트가 될 때면 가장 중요하며 즐거운 시간인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접어든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스물여덟 살 때의 나. 엄마와 단둘이 떠난 여행에서 '찰칵'. 박가네 세 딸들. 킴, 켈리 그리고 나(사진 위부터).

물론 언제나 이렇게 즐겁고 해피한 내용만 오가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처럼 과거를 꺼내다 보면 영락없이 다투는 순간도 있게 마련이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특히 자매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그렇게 긴 시간을 싸우고 웃고를 반복하면서 새벽까지 우리는 매우 집중력 있는 대화를 하게 된다.

한 집에서 같이 산 시간이 많지 않아서인지 이렇게 한 번 만나면 무슨 세미나를 하듯 한 소재를 강도 높고 깊게 수다로 파기 때문에 아마 다른 집 자매들보다는 서로에 대해서 더 잘 아는 부분도 많은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아직도 각자의 미래의 꿈과 희망, 과거의 아프고 좋았던 일들, 특히 각자의 사는 방식과 감정을 서로 배우고 확인하고 가르친다.

#5. 과거, 현재의 나를 완성시킨 쓴 약


어린 시절의 나를 형성한 것은 다양성이었다. 다양성은 내게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쳐줬다면, 그래서 내 삶에 균형을 이루게 했다면, 그것을 알고 행한 다음에는 온 열정을 쏟아 달려야 한다.

우리 모든 삶의 일 속에 최고와 최선이 분명히 있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시간과 상대가 있다. 나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음악과 무대를 선택한 것뿐이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상 나는 전부를 넣어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하고 있는 일에 감동받기를 바란다. 그 세포들이 지지고 볶으면서 거대한 에너지가 발산되기를 바란다. 내가 선택한 일과 그것을 위해 최고와 최선이기를, 그것들을 위해 불타오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노력과 에너지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가장 뜨거운 곳에 있어야 한다.

할 거라면, 살 거라면 가장 뜨거운 곳 그 한가운데에서 가장 뜨겁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밋밋하게 죽으려 살 바에야 활활 타오르고 싶다.

<■글 & 정리 / 윤현진 기자 ■사진 제공 / 달 출판사 ■참고 서적 / 「그냥」(박칼린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