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기(2007~현재)

[전남 강진]사의재는 정약용선생이 강진에 귀양갈때 거처하던 주막이다.

여행을 꿈꾸며 2012. 6. 17. 23:18

강진 사의재 근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의재에서 차 한잔 먹기를 아내는 원했다.

저녁을 맛나게 먹었으니 소화도 시킬겸 차 한잔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하고 싶었던 아내의 바램이 있었다.

그러나 사의재에 도착하니 한산했다.

차를 주문하려고 주막에 들리니 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차의 재료가 바닥이 나서 주문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그 곳에서 차잔을 기울이지 못하고 사의재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구경하고 의미를 되새기며

마무리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의재]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1801년 11월 23일 낯선 땅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처음 묵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 곳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아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 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사의재는 "네가지(생각,용모,언어,행동)를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고 한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권신사회의 잔혹함으로 기구함과 절망감에 빠져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사려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하는가? 제자라도 기르셔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다산은 마음을 추스려

1802년 10월부터 최초의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강진읍에 6제자에게 스스로 편찬한[아학편]을 주교재로 당대 최고의 학당이 여기에서 세워진 셈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의 인심에 감복하여 "내가 강진에 귀양오기를 참 잘했다. 강진이 내 고향 같다"는 말을 통하여 강진을 고향처럼 여겼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4년여 동안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옆지기는 사의재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역사의 한부분을 알려준다.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있는 듯 보인다.

사의재의 아름다운 다산의 뜻이 여기에서 샘솟듯 솟아난 역사적인 공간이라니..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큰 꿈들이 생기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정겨운 싸리문이 그 당시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누군가 " 이리 오너라" 하고 들어올 것만 같은 그런 출입문입니다.)

 

(▼ 뒤로 돌아가 보니 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저 분들이 주모 할머니와 딸로 다산의 마음을 돌리어 놓은 위대한 멘토였답니다.)

 

 

 

 

 

 

 

(▼ 돌다리와 조그마한 정자 그리고 연못이 있어 아담한 공간입니다.

     잠시 들러서 지나가는 객들은 차나 한잔 하면서 쉬어감이 어떨런지?)

 

 

 

 

 

(▼ 아내와 아이들은 게임을 하나 봅니다.

    사의재와 관련된 퀴즈를 내면서 서로의 답을 확인합니다.)